" 절망과 한계속에 던져진 탈북자들, 그들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다 추방당한 천기원 선교사의 간증

"중화인민 공화국 형법 제318조 규정에 저촉, 사람들을 조직하여 중국국경을 불법적으로 월경시킨 죄로 당신을 체포한다"

나는 그렇게 중국 공안과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그로부터 220일간의 수감생활을 하여야 했다. 영하3,40도의 혹한 속에서 담요 한 장으로 버티며 아침저녁마다 끼니로 속에 아무 것도 없는 주먹만한 만두하나와 모래가 가득 섞인 물 한잔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과 굶주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런 대로 참을만 했다. 그보다 함께 동행했던 탈북자 들의 행방이 걱정되어 제대로 잠조차 이룰 수 가 없었다.

그 후, 탈북자에 대한 세계언론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지난 8월5일, 북만주 수용소군도에서 석방되었으나, 검찰에 빼앗긴 현금과 물건을 판사도 불법으로 인정하였기에 돌려 줄 것을 요구하자, 또 다시 17일동안 호텔에 감금시켰다가 수갑을 채운 체 8월22일 새벽, 12명의 공안(公安)이 지켜보는 장춘 공항에서 추방 절차를 치른 후 월드컵 4강의 여진으로 들떠있는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9년 나는 기독 신학교 2학년을 마친 후 1년을 휴학하게 되면서 중국의 선교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구걸하는 꽃제비 몇 명이 중국공안들에게 곤봉으로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마치 짐승을 패듯이 탈북 한 청소년들을 때리는 공안들을 보면서 나는 한 동포로서 그리고 같은 인간으로서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게다가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접해있는 강가마다 탈북자의 시체가 널려있는 것을 보니 실로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그 후 함께 선교지 여행에 참여했던 열 두 명의 동역 자들과 수시로 모여 탈북자 문제를 두고 기도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 동역 자들은 중국의 연변에서 보았던 꽃제비들을 돌보는 선교회를 설립하기로 마음먹었다.

1999년 10월3일 우리는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에스겔서37:17)라는 말씀을 가지고 선교회 설립예배를 드렸다.

선교회 첫 정기모임이 있던 날, 나는 한 청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김 군일(23세 현재 협성대 신학과 4학년) 1년 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그는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을 탈출하기 1년 전 굶어서 돌아가셨고 굶주림을 피해 어머니와 형과 함께 북한을 탈출했지만 온갖 고생을 다 하다가 겨우 형과 둘만 한국으로 들어왔고 그의 어머니는 중국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우리를 찾아온 바로 그 날 그의 어머니는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하다가 공항에서 중국의 경찰들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밤 동역 자들과 함께 그와 그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했다. 그런데 며칠 후 놀랍게도 그의 어머니가 중국공안으로부터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법출국을 시도하던 탈북자가 중국공안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외부의 도움 없이 다시 풀려 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 후 군일 군은 자주 우리를 찾아왔고 북한선교가 비전이어서 신학교에 다닌다는 그는 결국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가 우리 선교회 홈페이지에 쓴 글을 보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병을 앓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를 보면서 "군일이가 앓고 있는 저 병이 바로 우리 민족이 50여 년간 앓아온 병이로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문뜩 내가 저 병을 치료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대뜸 군일 군에게 "이번 여름 방학 때 네가 방학을 하게 되면 나랑 같이 너희 어머니를 찾으러 가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막상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 일을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 할 텐데 경비는 어디서 마련할 것이며 또 설령 돈이 있더라도 어떻게 남한으로 데려올 것인가.

결국 나는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눈물로 간구하였다. 드디어 군일 군과 약속한 8월. 나와 군일 군은 중국으로 나갔다. 군일군의 어머니를 보는 순간 군일 군을 처음 만났던 생각이 났다. 군일군의 어머니는 아들을 만난 것에 대한 기쁨에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수년간의 은둔생활 탓인지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 베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우리는 군일군의 어머니와 함께 16세 탈북소녀를 빼내기 위해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역의 변방 도시 남녕으로 갔다.

미리 그곳을 거쳐서 남한으로 들어온 귀순 자들로부터 자세한 약도와 정보를 얻어 가지고 가긴 했지만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우리가 가지고 간 정보와는 전혀 딴 판이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했다. 나는 첫째 날 국경 근처를 배회하면서 탈출로를 살폈지만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호텔로 돌아온 나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내 인생에서 그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낮에는 국경지역을 돌며 어떻게 하면 군일군의 어머니와 16세 소녀를 무사히 탈출시킬지를 생각하고 밤이 되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기를 며칠을 계속했다. 그러기를 일주일…….

다음날 새벽 1시경 나와 군일 군은 무작정 중국-베트남 국경선으로 뛰어들었다. 그 지역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경선이 그어져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지뢰가 매설되어 있고 코브라가 득실댄다는 정글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2시간을 헤매다 결국 베트남 땅을 밟는데 성공했고 정확한 지형을 눈에 익힌 후 2시간을 넘어지고 뒹굴며 중국 땅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나와 군일 군은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베트남으로 넘어갔다. 낮 동안에 우리는 지난밤 중국에서 넘어와 눈에 익혀 놓았던 장소를 확인한 후 기도하며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자정이 되어 우리는 확인해놓은 장소로부터 다시 거꾸로 중국 땅으로 넘어갔다.

또다시 2시간 정도를 넘어지고 뒹굴다 드디어 어제 머물렀던 중국 땅에 도착하여 군일 군이 절벽을 타고 약속한 장소로 어머니와 소녀를 데리러 내려갔다. 군일 군이 막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바로 근처 10미터 앞 건물에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고 커다란 공안(公安)이라는 간판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렇게 어렵게 찾아낸 탈출로가 바로 공안(公安) 앞마당이라니…….잠시 정신이 아뜩한데 공안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긴 베레다 권총을 허리에 찬 공안(公安)이 나타났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목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곳의 동정을 살폈다. 수비대의 허리춤에 매달린 권총이 너무나도 크게 보였다. 그제야 나는 어젯밤 우리가 국경을 넘은 곳,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건물이 중국 국경수비대 공안(公安)경비초소였다는 것을 알았다. 큰일이었다. 저쪽에선 이곳 상황을 알 리 없는 군일 군이 어머니와 소녀를 데리고 약속한 30분 후 이리로 올 것인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만일 월담을 하다가 그들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곳은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바로 사살을 당하는 곳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오직 기도 외에는…….

"하나님 저들이 자유를 찾아 자식을 찾아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제 한목숨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아직 주님의 복음마저 모르는 저 영혼들이 이렇게 죽음을 맞는다면 너무 가엾지 않습니까. 예수님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저들을 구원해 주십시오."칠흑같이 어둡고 높은 콘크리트 담벼락 위에서 나는 절박한 기도를 드렸다.

10시45분. 앞으로 15분 후면 건너편에 있는 군일 군은 아무 것도 모른 체 어머니와 소녀를 데리고 공안마당을 지나올 텐데. 또한 무사히 통과하더라도 2미터가 넘는 담을 오르는 순간 공안이 고개라도 돌리면 곧바로 총알이 날아올 텐데…….

정글의 벌레는 온몸을 물어뜯고 땀은 비 오듯이 흘러 옷은 축축하게 다 젖었다. 벌레 우는 소리와 공안 사무실에서 들리는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만 공포의 소리로 들려왔다. 이윽고 10시50분. 갑자기 경보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며 동시에 두 공안이 허겁지겁 튀어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 무의식적으로 소리 나는 방향을 내려다보았다. 땀이 너무 많이 흘러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공안 입구에 그곳 공안(公安)들이 사용하는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는데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걸 건드렸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경보소리는 공안 건물 입구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에서 나오는 소리였던 것이다. 윙윙거리는 경보음을 듣고 파출소 안에 있던 공안들이 튀어나왔다. 곧이어 공안이 오토바이를 쓰러트린 행인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10시56분. 소란이 가라앉는 순간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나님께 마지막 힘을 다해 간절히 부르짖고 눈을 뜨는 순간 공안 한 명이 사무실을 나와 옆방 숙소로 들어가더니 들어가자마자 불을 끄고 잠을 청하는 것이 아닌가.

10시58분. 권총을 찬 다른 한 명은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오더니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오토바이로 다가가 시동을 걸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군일 군이 어머니와 소녀를 데리고 마당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순간 감사의 눈물이 쏟아졌다. 얼른 밧줄과 손을 내밀어 그들을 끌어올리고 무사히 국경을 통과하여 베트남 땅을 밟는 순간 우리는 왈칵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 이렇게 정확히 짜여진 각본처럼 기적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새벽2시. 하노이까지 들어가려면 언제 강도로 돌변할지 모를 오토바이 뒤로 한 명씩 몸을 싣고 비포장 도로를 두 시간 정도 달려 자동차가 있는 도시로 가야하는데 맨 마지막에 나를 태운 오토바이가 갑자기 으슥한 골목으로 데리고 가더니 돈을 더 주지 않으면 못 간다는 것이다. 화도 나고 자존심이 상해 다른 오토바이를 탈것이라며 내려버렸더니 한참을 기다려도 다른 오토바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앞쪽 일행들은 영문도 모른 체 기다릴 텐데…….

한참을 지난 후 다른 오토바이가 나타나 흥정을 마친 후 출발했으나 또 다시 골목길로 들어가더니 돈을 더 주지 않으면 못 간단다. 어렵게 자동차가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1시간을 흥정한 후 하노이로 출발했지만 도중에 5번의 검문을 당했다.

매 순간마다 가슴이 철렁 하였지만 나와 군일군의 여권만 보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중국을 출발하여 캄보디아에 도착하기까지 모두 14번의 검문을 당했고 한번도 군일군의 엄마와 소녀의 신분증을 보자는 요구가 없었다. 자동차 안으로 얼굴을 손전등으로 자세히 비춰보면서도 그들의 눈에는 이들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가려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군일군의 어머니와 소녀를 중국에서 월남을 거쳐 다시 캄보디아 대사관에 도착할 때까지 맹독의 뱀이 우글거리는 정글을 헤매며 총과 지뢰밭을 통과하고 강도와 언어의 불통, 숨이 막힐 듯한 살인적인 무더위와 수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로 기적적으로 지켜주셨다. 이것이 내가 탈북자를 남한으로 구출한 첫 번째 계기였다.

그 후 나는 250여명의 탈북자를 국내로 데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지켜 주셨다기 보다는 절박한 생사의 고비에서자유를 찾아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들을 위해 지켜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피난처나 탈북자 무리 속에는 특무 교육을 받아 탈북자를 가장한 프락치가 있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신고로 하마터면 특무에게 납치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50여회 오간 여정을 통해 쌓아놓은 노하우를 통해 나도 모르게 인간적인 자신감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열두 명의 탈북자를 데려오는 과정에선 하나님의 확실한 기도 응답 없이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나하고"(수9:14) 기브온 거민 에게 속고 말았던 여호수아처럼 그저 내 인간적인 노하우만 믿고 시도했던 것이 이번에 가장 크게 회개를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

중국돈 3,000위엔에 인신매매 됐다가 구출된 여인, 그리고 출산을 코앞에 둔 임산부 부부를 비롯하여 북한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갖가지 절박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열두 명의 탈북자들. 이들이 만일 중국공안이나 북한특무에 검거되어 강제 송환 되면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다. 특히 이들 중 임신한 여성은 아무리 임신 말기라 하더라도 무조건 낙태를 시켜 아이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다.

나는 우선 그들을 국경근처까지 데려다 준 다음, 몽골에서 만나 합류할 예정이었다. 북만주와 접한 몽골 국경 지역은 몇 달 전부터 직접 현지답사를 통해 지형과 검문소 현황 등을 조사하고 중요 거점은 비디오와 사진으로 찍어둔 터였다.

이것은 몇 년 전 몽골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은 철민이의 죽음이 가슴 아프게 남아있었기에 지도와 나침반 보는 법, 그리고 별을 보고 길을 찾는 법까지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연길에서 함께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나흘 만에 무사히 내몽골에 닿을 수 있었다. 도착 후 그들은 나와 떨어져서 몽골국경과 사막을 지나 외몽고로 들어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임신을 했던 김여인이 기차를 놓치기도 하며 몇 번의 위기의 순간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내몽골 . 나는 그들에게 국경과 사막을 지나 외몽고로 들어가도록 길을 안내하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하이라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택시 기사가 야간통행 허가를 얻어야 한다며 경찰서로 차를 몰았던 것이다. 나는 중국에서 이미 공안에게 많은 검문을 받아본지라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나는 여권을 제시하고 간단한 조사를 마쳤다. 심문을 맡은 장교는 특별히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날 오전 중으로 석방 해준다고 하였다. 나는 군대의 빈 막사에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잠시 눈을 붙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들더니 누군가 나의 몸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국경근처에서 북조선 탈북자 12명을 검거했는데 그들과 내통한 혐의로 체포한다." 군인은 거칠게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다시 군대로 끌고 갔다. 그때 나의 머리엔 이제 곧 출산을 앞둔 김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님, 그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그들을 지켜주십시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폭설과 엄청난 추위에 지친 이들이 빈 집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그곳에 거주하는 몽고인이 이들을 보고 신고를 해서 검거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많은 탈북자들은 중국과 몽고 등지를 떠돌며 인간이하의 대우를 받고 있다. 특히 탈북 여성들은 인신매매를 하는데 이러한 행위를 중국 현지에선 '조선돼지 장사'로 불리기도 한다니 탈북자 뿐 아니라 우리 민족에 대한 모멸이요, 수치이다.

탈북 남성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조선족이나 중국인 집에서 뼈 빠지게 일 을하고도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오히려 공안에 신고하겠다는 위협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한 절망과 한계 속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생명을 건 탈출, 바로 '남한 행'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실정법에 위반되는 것인 줄 알고 있지만 탈북자들을 돕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탈북자를 대하는 부당한 중국에게 보다 확고한 우리의 외교력이 필요하며 이들의 난민 지위 획득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공산체재 속에 길들여져 남한의 '경쟁'에 서툴다. 또한 탈북 과정 중에 인생의 큰 상처로 영혼이 피폐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단지 동정적인 관점에서 감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오랜 인내심과 여유를 가지고 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북한에도 주님의 손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