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o,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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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뀌는 주민의식
김정일 노동당총비서가 주창하는 '신사고'는 북한 주민들의 가치관 변화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변화해야 한다는 내부적인 압력을 수용했다는 뜻이다. 교조적인 유일사상체계만으로는 환경적 변화로부터 느껴지는 상대적인 빈곤감이나 박탈감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김 총비서는 읽고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주민들의 가치관 변화는 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84년에 제정된 '합영법'과 87년에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물질적으로 넉넉해보이는 '서구식 풍조'가 들어갔고 이것이 북한주민에게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일부 연예인이나 대외무역종사자들 사이에서 '서구식 풍조'를 모방해 짙은 화장, 화려한 몸치장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에따른 일반주민들의 상대적인 박탈감은 알게모르게 가치관의 전도로 이어지게 됐다.
'조국' '동지' '국가'와 같은 말들이 상징하던 공동체 의식이 엷어지고 순진함, 미숙한 상술과 소비절약 등으로 대표되던 그들의 질박한 덕목은 점차 화폐가치와 유통을 인정하고 선호하는 물질주의적 경향으로 바뀌어 갔다.
주민들의 가치관 전도현상은 9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몰락과 악화일로의 경제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었고 그것은 점차 혁명의식의 퇴색, 배금주의 확산, 사회일탈 등으로 나타났다. 사회주의 경제체제 아래서는 볼 수 없었던 이자놀이와 먹고 입는 문제를 비공식적인 시장 즉 암시장에 의존해서 해결하는 추세가 일반화됐다.
국가관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신념이 점차 희박해지고 무사안일 또는 보신주의가 만연돼 '우선 나부터 살고보자'는 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이 무렵 등장한 각종 구호들, 예를들면 ' 우리식대로 살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등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교적인 윤리규범에 익숙해 있던 이성관(異性觀)도 변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애와 결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이에따라 한때 북한은 월간지 천리마 등을 통해' 결혼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처럼 그 어떤 인생의 치부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이기적인 선택이 아닌 당과 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사랑과 결혼을 해야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북한당국도 주민들의 이러한 의식변화에 적극 대처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모기장 전략'을 통해서이다. '어차피 (외풍을) 막지 못할것이다. 막지 못할바에는 면역이 될 만큼 조금씩 들어오게 한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들어 사랑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문예물과 전자악단, 여성들의 색조화장을 허용한 것이나 이후 금융활동에 대한 정책을 바꾸고 생필품 직매점을 늘인 것 등은 모기장 전략의 산물이다.
여성들의 색조화장을 허용하면서 평양시내 김일성광장 근처에 위치한 제일백화점 화장품 코너가 성황을 이루게됐고, 금융활동의 변화는 현금경제가 기존의 배급권을 밀어내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개인예금에 대한 이자지급, 생산성을 향상시킨 노동자들에게 장려책으로 현금 보너스나 상품이 지급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복권은 당첨된 사람에게 TV세트를 살 수 있을 정도의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생필품 직매점은 지난 84년부터 시 군 면 단위에 설치되기 시작, 88년에는 소매상품 유통량의 9.5%를 차지할만큼 크게 늘어났다. 지금은 직매점을 통한 유통상품의 가지수도 5만여종에 달하고 있는데 이 직매점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형태라는 점에서 북한사회 변화의 대표적인 단면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평양에 직장인을 위한 선술집 3곳이 지난해 4월부터 문을 열게 된 것도 주민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 선술집은 닭공장에서 부산물로 나오는 닭발 등을 안주로 내놓는데 오후 4시에 문을 여는 창광거리 선술집은 하루 700여명의 손님이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북한주민들의 가치관 변화에 대해 북한당국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를 '사회주의권을 몰락시킨 황색바람의 침투'로 경계하는 시각은 여전히 강하다. 금년들어 부쩍 '동지애'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런 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예를들면 지난 1월11일자 노동신문은 '우리가 그 어느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혁명적 동지애로 일심단결을 이룩하고 혁명을 힘차게 전진시켜 나가고 있는데 당당히 자랑해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우리혁명의 첫 시기부터 높이 들었던 동지애의 구호를 계속 높이 들고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체제를 지키지 못하면 경제재건도 없다'는 북한당국의 속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대목이다.
북한주민의 가치관 변화이 궁극적으로 김정일총비서의 '신사고'를 이끌어냈지만 사상과 체제유지를 우선시하는 북한당국의 정책과 조화를 이루려면 아직도 갈길이 멀다. 이와관련, 이우영 통일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당국은 어느정도의 변화 욕구는 수용하되 체제유지를 위한 사상 강화 정책을 펴나가는 데 기본적인 역점을 두게 될 것이다. (주민들) 변화 욕구는 물질적 수요를 채워주는 형태가 될 것이고 따라서 경제력 회복 여부가 주민들의 가치관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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